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종교 개혁 (문단 편집) === 종교개혁 과정에서 루터의 역할 === 결론부터 말하자면, 현대 역사학에서는 종교개혁이 특정한 사건이나 인물로 인해서 갑작스럽게 생긴 일이라기보다는 시대적 상황에서 여러가지 요소가 상호작용하는 과정에서 그것들이 눈덩이처럼 굴러 일어난 일이라고 보고 있다. [[마르틴 루터]] 때문에 종교개혁이 일어났다고 말하기 어렵고, 루터가 없었더라도 종교개혁이 일어났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종교개혁을 가능하게 했던 요소는 상당히 많고 루터도 그 중 하나이다'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 흔히 종교개혁의 시작을 [[마르틴 루터]]가 1517년에 [[면죄부]] 판매에 반대해서 95개조 반박문을 내걸었을 때로 보는 게 일반인들의 시각이지만 학자들은 프로테스탄트의 종교개혁, 그에 맞선 [[가톨릭]]교회의 대항종교개혁 모두 시대적 산물이고 내적인 변혁이라는 견해가 보통이다.[* [[카를 마르크스]]의 경우 "[[자본주의]]가 종교개혁을 탄생시켰다"고 평가했고, 반대로 막스 베버는 "종교개혁으로 인해 생긴 신교도 지역에서 자본주의가 발전했다"고 주장했는데 두 상반된 주장처럼 간단하게 원인과 결과를 찾지 않는다. 각각 현대에 보기엔 무리한 근거들이 많기 때문. 오늘날에는 자본주의와 개신교의 연관성에 관한 시선에 역사학자들이 회의를 보내고 있다. 자세한 건 [[막스 베버]] 항목 참조.] 다만 개신교계에서는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게시한 '''1517년 [[10월 31일]]'''을 '''종교개혁 기념일'''[* 따라서 개신교에서는 10월 마지막 일요일(주일)을 종교개혁 기념주일로 삼는다. 물론 [[가톨릭]]은 그리스도교 일치 기도 주간은 10월 마지막 일요일이 아닌 [[사도 바오로]] 축일에 맞춰서 1월 후반으로 삼는다.]으로 삼고 있다. 다시 말해 지나치게 인물사적인 관점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19세기 [[토머스 칼라일]]은 [[마르틴 루터]]가 없었더라면 하는 if 떡밥으로 '''루터가 없었으면 프로테스탄트도 없고, 독일의 분열도 없고, [[프랑스 혁명]]도 없고, 미국의 독립도 없었다'''는 식의 책을 써서 유명해지긴 했지만, 근대 사학의 입장에서 이러한 영웅주의 사관은 거의 인정받지 못하는 추세였다. 이러한 경향은 19세기부터 두드러졌는데, 종교개혁을 다룬책에 [[마르틴 루터]]나 [[울리히 츠빙글리]] 같은 인물에 대한 연구 자체가 빠져버리고 대략적인 서술만이 남은 경우도 남아서 1970년대부터는 인물사 경시에 대한 반성이 이뤄져서 시대적 사건과 함께 균형적으로 연구하는 추세다. 다시말해, '''오늘날 학자들은 종교개혁을 루터와 츠빙글리와 가톨릭 쇄신가 등 개인들에 맞추는 영웅주의적 사관을 배격함과 동시에, 종교개혁이 시대적 요구 때문에 루터 등의 개인적 역할 없이도 반드시 촉발될 수 있다는 사관도 배격한다.''' 이는 다른 역사학 분야에서도 유사하다. 가톨릭 교회사학자나 개신교 학자나 인물사적 사건으로 보지 않는다. 종교개혁의 이론적 기반이 되었던 고대 [[교부]] [[아우구스티누스]]와 종교개혁 바로 이전시기 '후기 [[스콜라 철학]]'에 대한 연구가 많이 진행 중이다. 종교개혁 시기 수백 년 전 중세 [[가톨릭]]교회 자체는 물론이고 유럽 각지에서 개혁적인 분위기가 있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루터도 이전의 개혁적 분위기나 사상가들에게은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종교개혁을 일으킬수 있었다는 것. 위와 같은 배경들이 없었다면 루터의 사상이 탄생하기 어려웠을 수 있다. 다만 루터의 종교개혁은 다른 종교개혁과 차이는 있다. 루터 이전에는 [[가톨릭]] 내부의 개혁이었던 반면, 루터의 종교개혁은 가톨릭과 결별하면서도 동시에 양지에서 21세기까지 막힘 없이 그 계보가 이어졌기 때문이다.[* 그 이전까지 [[발도파]]는 [[알프스]] 산속에서 은둔생활을 하고 있었으며, 밑 각주에서 반복하지만 [[얀 후스]]와 [[존 위클리프]]의 말로는 별로 좋지 않았다.] 비록 이것을 당대 개혁가들이 원하던 결과였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루터 측의 멜란히톤과 가톨릭 측의 가예티노 등 화합을 원하던 온건파는 분명히 있었다. 1530년 아우크스부르크 제국의의에서는 멜란히톤은 "적어도 두 논점(평신도의 성혈 배령과 사제의 결혼)만 가톨릭이 양보한다면 재일치의 길에는 아무런 방해가 없을 것"이라고 언명했고, 가예티노 추기경은 "공의회에서 결정해야 한다"고 단서를 달기는 했으나 원칙적으로 긍정적인 대답을 했다. 두 논점이 신앙과는 관련이 없고 다만 규율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천천이 곱씹어보면, 양측이 그야말로 어떻게든 재일치하겠다는 의지로 활활 불타고 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루터의 반대("나는 교리의 일치에 관한 토의에 대해서는 도무지 좋아하지 않습니다"{{{-2 August Franzen, 《Kleine Kirchengeschichte》}}})와 가톨릭의 30년 넘은 느릿느릿한 대응(1563년 트리엔트 공의회에서야 평신도의 성혈 배령을 다룸)으로 재일치가 실패했다.] 아무튼간에 중세와는 판이하게 다른 종교적 환경이 촉발되는 데 루터의 비중이 컸음은 부정할 수 없다. [include(틀:문서 가져옴, this=문단, title=마르틴 루터, version=775, paragraph=2.1.)] 루터의 종교개혁 과정에서 시대적 배경의 역할이 큰 것은 사실이나, 루터 개인의 역할이 작은 것도 아니다. 본 문서에도 시대배경을 강조하는 서술이 많다. 그러나 시대배경을 강조하는 이유는 이전의 종교개혁사가 지나치게 루터의 개인적 노력을 위주로 서술된 것에 대한 반작용에 가깝다. 지나치게 시대배경을 강조하여 종교개혁을 서술하려는 움직임에 대한 반작용 역시 있다. 루터의 종교개혁과 그 이전의 교회 쇄신운동은 큰 차이가 있다. 루터가 르네상스와 인문주의 학문적 기반의 교리와 개혁이라면, 공의회 주의 [[수도원]] 운동과 가톨릭 개혁운동은 내부에서 개혁을 기반으로 한다. 이 때문에 1517년에 일어난 [[95개조 반박문]]의 게시로 촉발된 종교개혁의 한 흐름을 역사학계에서는 이전의 혹은 이후의 다른 개혁 노력과 다르게 취급하는 것이다. 이처럼 루터의 종교개혁을 다른 종교개혁과 차별화 하는 것은 역사학계의 통설이다. 루터가 부패를 쇄신하는 작업만 한 것이 아니라 '''교리를 비판'''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예수회]] 등 루터 이후 가톨릭의 개혁노력도 있지만 교회 개혁을 위한 그런 내부적인 노력을 새로운 사상으로 분류하지 않는 것을 생각하면 루터의 독특한 지위를 이해할 수 있다. 거칠게 말해 부패한 성직자들을 비판하는 데 성직자를 때리는 것이 아니라 교리를 때렸다는 점에서 루터의 특징이 있는 것이다. 루터는 단순히 부패한 성직자들에 대한 자정을 촉구하지 않았다. 루터는 '''중세신학이 교회를 잘못 이끌고 있다'''라고 주장하였다. 루터의 관점에서 면죄부나 다른 도덕적 타락은 잘못된 신학이 낳은 부작용에 불과하다. 역사적 배경이 지나치게 강조되어 루터의 역할이 무시된다는 문제의식 하에서 종교개혁사와 마르틴 루터 연구의 권위자인 [[알리스터 맥그래스]]는 과거의 연구가 지나치게 사회 구조적 분석에만 치중했음을 비판하고 최근 연구를 소개하며[* Susan C. Karant-Nunn([[애리조나 대학교]]), The Reformation of Ritual: An Interpretation of Early Modern Germany , Christianity, and Society in the Modern World (London: Routledge, 1997); Steven E. Ozment([[하버드대학교]]), Flesh and Spirit: Private Life in Early Modern Germany (London: Penguin, 2002).] 기존 주장 즉 종교개혁이 복합적인 외부 요인으로만 발생한것이 아니라 ''' 마르틴 루터 개인의 역할 또한 비중상 높이 평가''' 받고 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If the origins of the Reformation in Germany are interwoven with its distinctive cultural dynamics at that time, this does not mean that this increased appreciation of the importance of social history denies a pivotal role to individuals, either as causes or catalysts of events. >(옮긴이 주(의역): 비록 독일에서 일어난 종교개혁의 근원들이 당대 독일의 특징적인 문화적 상호작용의 결과라 할지라도 역사적 배경이 갖는 증가된 중요성이 종교 개혁 과정에서 개인들의 결정적인 역할과 개인들이 사건들의 원인을 제공하거나 기폭제가 되었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 >Christianity's Dangerous Idea, The Protestant Revolution--A History from the Sixteenth Century to the Twenty-First p.34 >(기독교 그 위험한 사상에 대하여)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